유일한 증거는 피해자·용의자 증언 뿐...주요 증거 모두 폐기

경기 남부 지방경찰청 입구 (사진 = 홍서연 기자)
경기 남부 지방경찰청 입구 (사진 = 홍서연 기자)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유력 용의자로 지목된 이춘재씨가 그동안 모방범죄로 알려졌던 8차 사건의 범행을 자백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경찰은 당초 이씨가 14건의 살인을 자백했다고 밝혔으나 8차 사건에 대해서는 별도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언론 등을 통해 이씨가 모방범죄로 알려졌단 8차 사건 또한 자신의 범행임을 자백했다는 사실과 8차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된 윤모씨가 20여년의 수형생활에 지속적으로 억울함을 호소해왔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경찰은 10일 뒤늦게 브리핑을 통해 8차 사건과 관련된 추가 수사 사항을 밝혔다.

반기수 경기남부지방경찰청 화성연쇄살인사건 수사본부장은 “현재 8차사건은 대상자 이춘재의 진술에 대한 신빙성을 확인하기 위해 구체적인 진술을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이씨의 자백이 맞을 경우를 대비해 8차 사건 당시 수사 관계자 등을 상대로 윤씨를 범인으로 특정해 자백을 받은 경위 등에 대해 수사 중이다”라고 언급했다.

8차 사건 당시 범인으로 지목된 윤 모씨는 과거 8차 살인사건 당시 혈액형, 체모, 방사성동위원소 등의 국과수 검사 결과를 증거로 8차 사건의 모방범으로 확정판결 받았다. 무기징역으로 투옥된 윤 씨는 20여년의 수감생활 끝에 지난 2009년 가석방됐다. 윤 씨는 과거부터 경찰의 협박과 고문으로 자백했다고 발언하는 한편 쪼그려뛰기와 3일의 철야수사 등 가혹행위가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경찰은 유력용의자 이춘재에 대한 수사접견과 대면조사를 어제까지 총 13차에 걸쳐 진행해 왔다. 이씨는 면담 과정에서 자백을 번복하지 않고 일관되게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8차사건 당시 윤씨 지목 원인은 체모...추가 증거 모두 폐기돼 수사 방향 요원

8차사건 당시 경찰은 사건현장인 방 안에서 음모로 추정되는 체모를 발견한 후 국과수에 감정을 의뢰했다. 이를 통해 국과수는 용의자의 혈액형이 B형이라는 점과 미량의 티타늄이 함유됐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한편 체모의 형태학적 분석을 수행했다.

경찰은 당시 용의자로 지목된 윤씨로부터 네 차례의 체모검사를 실시했다. 같은 농기계 수리공장에 근무하는 300여명의 사람들을 통해 진행된 첫 번째의 검사 후 50여명의 사람들을 함께 분석한 2차 검사, 십여명을 대상으로 한 3차검사 후 최종 4차검사에서 방사성 동위원소를 분석했다.

4차례에 걸친 검사 결과 혈액형이 같고 형태적 소견이 유사하다는 결론이 나오자 경찰이 범인을 윤씨로 단정지은 것이다.

반 수사본부장은 “당시 수사본부에 속해있던 경찰관계자들 모두 국과수의 감정결과가 확실하다고 믿고 대상자를 조사해 자백을 받게됐다고 파악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경찰은 국과수에 당시 감정 진행 방식과 결과에 대해 재검증을 요청해둔 상황이다.

다만 국과수 측에 당시의 증거물과 기록이 남아있는지 여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단지 국과수로부터 전달받은 당시의 감정서사본을 국과수측에 다시 발송해 감정의 절차와 방법론 등을 확인받는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8차사건의 경우 검찰과 경찰 모두 사건기록과 증거물 등을 폐기한 상황이어서 정확한 진실규명이 가능할지는 요원한 상황이다. 경찰은 오산경찰서 문서부에서 당시 사건의 기록 사본과 일부 잔여증거물을 발견해 국과수에 감정 의뢰를 해둔 상황이다.

하지만 이 증거물은 현장에서 발견된 클로버 종류의 풀 한 포기와 타 지역의 유사 절도 사건의 현장에서 발견된 창호지에 불과해 실질적인 증거가 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당시로서도 증거로서의 가치가 없어 검찰에 송치하지 않아 폐기되지 않고 남아있는 것. 경찰은 희박한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남아있는 유일한 증거물이기에 최대한 기대를 걸어본다는 방침이다.

뒤늦은 8차사건 언급 '은폐' 시도 의혹

한편 이날 브리핑에서 가장 이슈가 된 지점은 경찰이 이춘재의 첫 자백 후 경찰이 고의적으로 8차사건의 범행을 언급하지 않았는가에 대한 의혹이다. 이춘재의 자백 소식이 언론을 통해 밝혀진 후 경찰은 이씨의 자백 이후 화성사건을 포함한 14건의 살인을 자백했다고 발표해 왔다.

기존 모방범죄로 알려진 8차사건의 범행을 이춘재가 자백했다면 이러한 지점 역시 우선적으로 밝혀야 했다는 지적에 경찰은 “신빙성을 확인하는 단계여서 언급할 수 없었을 뿐”이었다며, “은폐하고자 할 의도는 절대 없었다”고 언급했다.

이씨의 자백이 기억만에 의존해 진행된 만큼 사건과 관련된 증언의 정확도에 편차가 있고 구체적이지 않은 자백만으로 이뤄져 이러한 신빙성을 확인하는 절차가 반드시 필요했다는 설명이다.

반 수사본부장은 “자백했을 당시 14건으로 발표한 이유는 결코 은폐하고자 함이 아니라 신빙성 확인의 절차가 필요했기 때문”이라며, “특히 8차사건의 경우 윤씨가 수형생활을 이미 마친 상황이어서 더욱 정밀하게 신빙성을 검증해야 했던 상황에서 보도가 되어 당황하고 곤란한 상황”이라고 언급했다. 하지만 첫 브리핑 당시 8차사건에 대해 경찰측에서도 인지하고 있으면서 발표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정확한 답변을 피했다.

대면조사를 통해 이미 이춘재의 자백을 확보한 상황에서도 8차사건의 범행 역시 자백했다는 정보를 의도적으로 차단해 온 셈이다. 그러면서도 은폐의 의도는 없었다는 경찰 측의 주장이 설득력을 갖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가혹행위 여부 또한 주요 쟁점

한편 당초 8차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돼 2009년 가석방되기까지 20여년 수형생활을 해온 윤모씨는 변호사를 선임해 무죄 재입증 소송을 준비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윤씨는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경찰의 폭언과 구타, 고문까지 당해서 어쩔 수 없이 범죄사실을 자백하게 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윤씨는 재판 당시에도 지속적인 구타와 잠을 재우지 않는 등의 경찰의 고문 때문에 자백할 수밖에 없었다며 항소했으나, 법원은 이를 기각했다. 윤씨는 형을 선고받고도 여러차례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측은 당시의 수사관계자가 대게 퇴직한 상황으로, 참고인 신분으로 조사하고 있다. 이들은 당초 알려진 것처럼 증거가 확실해 고문 등 가혹행위를 동원할 필요가 없었다는 취지의 증언을 한 것으로 경찰은 밝혔다.

윤씨는 언론 등을 통해 3일의 수사기간을 거쳤다고 언급한 반면 당시 검찰에 송치된 수사기록 등에는 체포 당일 새벽 증거를 제시하자 윤씨가 바로 자백했다고 기록된 것으로 알려졌다. 만약 추가 조사 결과 경찰의 조사기간이 문서와 다르다고 밝혀질 경우 가혹행위가 있었다는 윤씨의 주장이 힘을 얻을 것으로 전망된다.

윤씨가 주장한 쪼그려뛰기 등 가혹행위에 대해서도 경찰은 조사가 진행되지 않아 자세한 사항은 언급하기 어렵다면서도 이씨의 8차사건 범행이 확정될 경우에 대비해 실체적 진실을 입증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가혹행위가 있었다고 입증될 경우에도 공소시효 등이 지나 실질적인 처벌 등은 어려울 전망이다.

국과수를 상대로 당시 증거물에 대한 감정 도출과정을 확인 중에 있다는 설명이다. 방사성동위원소 분석 결과에 대한 재검증, 현장 발견 음모의 혈액형 판별 오류 가능성 등에 대해서도 확인을 요청해둔 상태다.

반기수 경기남부지방경찰청 화성연쇄살인사건 수사본부장은 “수사본부는 화성연쇄살인사건 진실 규명과 함께 당시 수사과정 등에 대해서도 한점의 의혹도 남지 않도록 철저하게 수사하겠다”고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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